엔지니어의 황금 시대 (The golden age of engineers)

전쟁이 끝날 무렵, 상황이 바뀌었습니다. 전쟁을 치르는 동안 기술 지원이 중단되었던 생고뱅 그룹은 생산 기술을 자체적으로 개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. 이후 연구소가 가동되기 시작하면서 원래의 섬유 생산 원칙에 기반을 둔 새로운 공정인 TEL공법이 개발되었었습니다. 이는 기술과 상업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, 세계적으로 각종 라이선스 허가를 취득하면서 이소바에게 새로운 영광의 시대가 막을 열었습니다.

1945년 - 1946년

1945 - 1946

생고뱅의 엔지니어 피에르 헤임(Pierre Heymes)은 섬유 생산 공정에 관한 핵심 특허 2건을 출원했다. 특히 두 번째 건은 유리를 늘이기 위해 원심력과 열풍 제트의 움직임을 조합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내용이었다.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생고뱅이의 섬유화 원칙의 첫 번째 버전이었다.

 

1950년

 

1950

지나치게 복잡했던 LET(Laboratoire Etudes Thermiques, 실험실 열 연구) 기기에 대한 시험에 실패한 이후, 헤임은 실제로 몇 년 전에 이미 내놨던 이 아이디어를 “처음부터 다시 검토” 하기로 하였습니다. 이에 Rantigny 재판을 시작하기 전에 빌란(Billan) 법정에서는 바닥 부분에 섬유 디스크가 장착된 최초의 TEL(LET을 뒤집어 놓은) 기기가 등장하였습니다.



 

1957년

 

1957

결국, 개발된 지 8년 만에 TEL (개발자들은 Supertel이라고 명명)이 Rantigny에서 처음으로 산업용으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오웬의 공정을 대체하게 되었습니다. 공장 관리자였던 Gabriel Aufaure는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했는데, 다른 어떤 공정보다도 훨씬 우수했던 TEL 공법이 곧 전 세계를 장악하게 이르렀습니다.



 

1960년

 

1960

두문자어인 CRIR로 더 유명한 Rantigny 산업 연구 센터에서 건설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. 진정한 의미의 개발 연구 센터였던 이 건물은 시험 라인들을 갖춘 세 동의 대규모 기초 연구실(화학, 물리학 및 응용과학)을 건립하였습니다.



 

1967년

1967

TEL공법은 그라스울을 미국에 수출하기 위해 생고뱅과 서튼티드(CertainTeed)가 합작하여 설립한 회사인 CSG를 통해 지역 내에서 오웬스 코닝 (Owens Corning)과 경쟁하기 시작하여습니다.





 

1973년 - 1979년

1973 - 1979

제4차 중동전쟁(1973년) 이후 발생했던 이란 혁명(1979년)으로 인해 전후의 평화로운 시기가 끝남을 고하는 두 차례에 걸친 오일 위기가 닥쳤습니다. 에너지 가격이 오르고 단열재의 값이 치솟았지만 이소바는 10년 동안 줄곧 발전을 거듭하였습니다.